아직 남은 희망을 위해
유년 시절 어머니의 잦은 가출로 우리 삼 남매는 수시로 시골 할머니께 맡겨졌습니다. 그럴 때면 어린 내게는 어머니의 빈자리도 컸지만 무서운 할머니와 지낸다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할머니는 내게 “니 어미랑 닮아서 꼴도 보기 싫다. 어미 찾아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가시는 횟수는 내가 아홉 살 때 더욱 잦아졌습니다. 한 번 나가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일 년 이상 걸렸습니다. 비록 가난한 형편 때문에 부부 싸움은 자주 하셨지만 아버지는 새벽부터 공장에 나가 일하시는 매우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기계에 아버지의 바짓가랑이가 말려 들어가 허벅지 부상을 크게 당하셨을 때도,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내가 중3 때, 아버지는 도시에서의 삶에 지쳤는지 할머니 댁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시골 방앗간에서 일하며 거의 날마다 술을 마셨고 그렇게 외롭고 힘든 마음을 달래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몸져누우셨고,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지자 두 살 위 형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나를 상업고등학교에 보내 주었습니다. 그때 여동생은 겨우 여덟 살. 나보다도 부모님의 사랑을 맘껏 받지 못하는 동생이 안타까워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살겠다며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해 추석을 맞아 외갓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웬 아저씨를 데리고 온 게 아닙니까. 세상에 아버지가 떠나신 지 얼마나 됐다고…. 어머니가 너무 미워 심하게 말다툼을 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다시 집을 나가셨고, 삼 남매는 또다시 버려졌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증오했습니다. 어머니 없이도 잘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꼭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주식에 손을 댄 나는 큰 빚을 지고 직장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2년간 많이 방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고단한 삶을 살며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을 앓던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나마 의지가 됐던 형마저 내 곁을 떠나니 가슴에 대못이 박힌 듯 아파 왔습니다. 왜 이리 많은 시련이 오는지 나도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가엾은 여동생 때문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막노동 현장을 전전했습니다. 왜소한 체격으로 고된 일을 하다 보니 정말 뼈마디가 부러지는 듯 아프고 힘들어 생전의 아버지처럼 술에 의지해 잠드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 무렵이었을 겁니다. 어머니가 새 남편과 싸우고는 갑자기 나를 찾아와 함께 살자고 제안한 것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자식을 도피처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화가 치솟았지만 늘 사랑을 찾아, 좀 더 나은 삶을 갈구하며 떠돌아다니는 어머니가 가엾어서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 달 만에 새 남편 곁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친척으로부터 어머니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정불화와 형의 죽음으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형처럼 스스로 삶을 마감하셨다는 것을….
나는 우울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 외롭게 살다 간 형을 위해, 한 많은 인생을 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 겁니다.
한때 내가 꿈꾸었던 경찰관이 되기 위해 한 걸음씩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겠습니다. 그렇게 당당한 오빠가 되어 내게 유일하게 남은 사랑하는 여동생에게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필자 : 유정현님 출처 : 월간《좋은생각》 2008년 03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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