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혁명이다. 그래서 근대화 원년이다.
군사혁명으로 역사에 돌발적으로 등장한 지도자 박정희.
그의 두려운 적은 북한이 아니었다.
오만한 미국도 아니었고, 어떤 야당 인사도 아니었다.
가장 두려운 적, 그래서 결연히 맞써 싸웠던 적은 바로 필리핀보다도, 말레이시아보다도, 버마보다도,
대만과 태국보다도 아득히 뒤떨어져 아시아에서도 바닥을 기는 나라,
산업구조의 7할이 농업이면서 해마다 춘궁기를 겪는 나라 대한민국의 가난, 굶주림,
그리고 희망없음이었다.
1961년 3월 전남도청이 공식집계한 도내 절량(絶糧)농가는 16만4천42호로 총94만6천명이 대책없이 굶고 있었다.
당시 언론은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실업자가 수백만을 헤아리는 가운데 서울시내 각 병원에 피를
팔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참담한 민생 현장을 보도하고 있다.
굶주림이란 어떤 것인가.
백범(白凡)의 일화가 있다. 일제말기 인천감옥에 갇혀 있었던 백범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지옥은 밥 굶는 것이다. 감옥에서 매맞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굶주림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적으로 5.16은 군사정변이라 하지만, 굶주림과 무기력, 절망과 허무주의가 만연한 시공(時空)을 뒤흔드는
굉음이었다. 5.16은 가난과 절망에 반기를 든 역사 빅뱅이었다.
박정희 혁명정부가 맞딱뜨린 것은 흉년이었다.
-6월 22일(토) / 어젯밤부터 호우. 전국적으로 풍수해가 심하다. 보리 흉년에 벼 흉년이 겹칠 듯.
혁명정부 지도자 박정희 의장도 운이 나쁜 편이다.
내리 2년을 흉년이니. 1963년 여름날의 풍수해 상황을 기록한 방송작가 박서림의 공개된 일기 대목이다.
관공서마다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이라는 국정지표를 써붙인 현수막이 내걸렸지만,
가혹한 흉년의 고통 앞에 민생고 해결은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다급한 것이 식량난이었다. 그해 6월 2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식량난 해결에 관민이 함께 협력할 것을
호소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을 굶기지 않을 것”이라고 울먹이며 다짐했다.
1967년 청와대 초청으로 모친과 함께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온 도산 안창호의 막내아들 안필영은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 만찬에 초청을 받았는데 박 대통령이 밀과 쌀을 섞어 지은 밥을 먹더군요. 깜짝 놀랐죠.
박 대통령은 국민들이 가난에 고통받는 게 마음 아프다고 했어요.”
그의 딸 박근혜는 어린 시절 가까이서 지켜본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60년대 가뭄이 심했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지방순시를 다녀오신 후 저녁식사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식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왜 식사를 안하시냐고 물으시니까 한참동안 천장만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지방에 가서 만난 아이들이 얼굴에 온통 버짐이 피어 있었고, 빡빡 깎은 머리마다 기계충이 옮아 있었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먹지 못해서 얼굴과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하시고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셨습니다. 나가시는 뒷모습에서 아버지 어깨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그날 아무도 저녁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 속에 배어 있는 배고픔과 삶에 찌든 아이들 어머니의 슬픈 눈동자를
아버지께선 외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외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2004년 3월30일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후 제17대 총선 방송연설에서)
지도자 박정희의 일념이 무엇이었던가를 알 수 있는 얘기들이다.
그렇게 정말 열심히 일한 결과, 박정희 시대(1961~1979)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서 1647달러로 20배 이상
급증했고, 61년 21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GDP)은 79년 616억 달러로 30배 가까이 늘었으며,
교역규모는 3억6천만 달러에서 354억 달러로 100배나 증가했다.
그동안 치약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던 업체가 오늘의 LG가 됐고,
수원에서 비단을 짜던 영세기업 선경이 SK그룹으로 성장했으며,
대통령 박정희는 전자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익을 위해 비호감의 기업인 이병철에게 반도체 사업을 허가,
오늘의 삼성전자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정주영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자동차, 조선, 건설을 아우르는 거대 왕국을 만들었다.
5.16혁명으로부터 50년,
주지하다시피 2011년 지금도 이들이 세계시장을 누비며 한국경제의 간판 역할을 하고 있다.
5.16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국가정체성 확고한 정권
5.16혁명은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그해 1961년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국민성을 바꾸고,나라의 운명을 바꾼 대전환의 원년이었다.
하긴 5.16에 동의하지 않는 정치 군상(群像)이 있긴 하다. 전직 대통령 김대중의 예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박정희 시대를 언급한 〈김대중 자서전〉 1권 137쪽부터 386쪽까지를 보면 “5.16쿠데타는 명분이 없었다”,
“5.16이 경제발전을 정체시켰을 수도 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민주당 계획을 베낀 것. 장면 정권이었다면 건전한 경제발전을 했을 것”,
“경제성장은 조짐이 좋았을 뿐 그나마도 노동자 착취로 이루어진 것” 운운하며 전면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의 말을 들어보자.
“5천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한국일보 2004년 12월29일)
정치와 아무 상관없는 한 작가의 평가가 이러하면,
김대중은 참으로 옹졸하고 궁색한 감정의 골짜기에 빠져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닐까.
김대중의 ‘박정희 시대 부정’은 국민 정서를 아랑곳하지 않는 독선적이고 저질스런 정치감정과 위선이
난무하는 정치판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거나 박정희 다음으로 대통령들을 모두 합쳐도 국민의 8할이 지지와 존경을 보내는 박정희에게 비교가
안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미당 서정주가 자기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듯이, 5.16혁명 이후 50년 동안 지도자 박정희를 만든 건
8할이 국민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5.16혁명을 “군인이 앞장서고 국민이 이룩한 것”이라고 말했다.
(1967년 5.16민족상 시상식 치사)
돌이켜보면 5.16혁명은 단순히 군사정변으로 끝난 완료형이 아니다.
국민이 이루어야 할 근대화 과업의 미래진행형이었다.
모든 성과를 국민에게 돌린다는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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