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활짝 열어젖히는 9월의 첫 휴일, 내게 광주댐 부근의 정자 중 가장 좋아하는 곳을 들라면 그 유명한 소쇄원도 아니고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도 아니고 송강 정철의 아름다운 로맨스가 있는 환벽당도 아닌 명옥헌이다.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독수정, 풍암정, 취가정 등 대부분의 정자가 광주댐 상류에 몰려 있는데 반해 명옥헌만 댐 아랫쪽에 위치해 있다. 댐아래 고서 삼거리에서 곡성 쪽으로 1Km쯤 내려가면 길 왼쪽에 인조대왕계마비라는 큰 돌비가 있는데 그 돌비가 있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1Km가다보면 왼쪽으로 후산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후산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 뒷편에 명옥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옥헌 찾기가 무척 어렵다. 물론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광주사시는 분들도 이 명옥헌 아시는 분은 몇 사람이나 될까? 아마 거의 모르실 것이다. 각설하고.... 후산리 마을로 접어들면 멋진 연못이 우리를 반긴다. 이 연못에 의자도 놓여져 있으니 잠시 차를 멈추고 명옥헌이라는 절세가인을 만나기 전에 잠시 설레임을 가라앉히는 것도 괜찬겠다. ![]()
아름드리 왕버들나무들이 개구리밥이 가득한 녹색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마을의 좁은 길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는 인조가 반정을 하기 전에 능양군 시절 호남에서 세를 규합하기 위해 오희도를 만나러 왔을 때 말을 매놓았다는 은행나무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길이 명옥헌길이다. 그러나 두 군데 다 이 갈림길에서 50m도 안되는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을 먼저 보셔도 상관은 없겠다. 좁은 마을길이 끝나면 갑자기 넓직한 명옥헌이 짠~~~~~하면서 나타난다. 이 명옥헌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우와~~~~~이쁘다" 이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정원이 예쁘기 때문이다. 이 명옥헌을 찾기가 어려워서 였을까? 조선시대 규중 속에 꼭꼭 숨어있던 예쁜 처자를 만난 느낌이다. 이 명옥헌은 오희도가 학문을 다 이루지 않아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고 능양군의 권유를 물리치고 학문에 전념하다 죽게 되고 그 아들 오이정(오명중,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자로도 불리우기 때문에) 이 부친을 추모하여 아버지의 사시던 곳에 명옥헌을 지어 스스로도 학문에 접어들었다는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그 해가 165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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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을 붉게 물들이는 배롱나무
명옥헌은 방형의 연못에 원형의 인공섬이 있는 우리나라의 전통 조경수법을 따라 조성되었다.
경회루의 수많은 기둥들도 바깥쪽은 사각형이고 안쪽의 기둥은 원형이다. 이는 천지(天地)를 나타내며 천지간에 사람이 사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못가에 수령이 수백년에서 수십년까지 다양한 수령의 배롱나무가 30여그루 심겨져 있다. 명옥헌을 상징하는 나무인 것이다. 배롱나무는 7월부터 9월까지 100일가량 핀다하여 목백일홍이라 부르고 순 우리말로는 배롱나무, 한자이름으로는 자미(紫薇)라 한다. 이 꽃이 세 번 피었다 지면 쌀밥을 먹는다고 해서 쌀밥나무, 나무에 간지럼을 피우며 끝이 흐느적거린다고 해서 간지밥나무 등으로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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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에 핀 배롱나무
벚꽃이나 개나리, 목련, 매화 등 보통의 꽃들은 짧은 기간 피었다가 지는데 반해 이 배롱나무는 석달 내내 그 화려한 꽃을 피우면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물론 꽃이 한번 피어 석달 내내 피어있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보면 피었다가 지고 또 다른 꽃이 피었다가 지는 식으로 번갈아 피니 우리 보기에는 석달 내내 피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석달 내내 피는 것 처럼 보이면 되는 것이지. 배롱나무는 중부지방에서는 기후조건이 맞지 않아 거의 식재를 하지 않을 뿐더러 식재해도 남부지방처럼 큰 거목으로 자라지 않는다. 이 수목은 주목처럼 원래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명옥헌에 있는 배롱나무는 토양조건이 잘 맞아서이기도 하지만 수령도 오래되어 거목으로 잘 자라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옥헌에 있는 배롱나무가 가장 거목들이다. 특히 8월의 명옥헌은 환상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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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언덕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배롱나무
입구와 반대쪽 언덕받이에 명옥헌 정자가 앉아있다. 정자의 이름은 명옥헌이 아니다. 오이정의 호를 딴 "x계정"인데 첫자가 생각이 안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자를 명옥헌으로 부르기 때문에 편의상 저도 명옥헌으로 호칭하겠다. 명옥헌 연못의 왼쪽에 농가가 있는데 어떤 시인(아마 황지우 시인일듯. 정확한 것은 아님)이 구입하여 정원쪽으로 큰 통유리를 내고 작업실로 쓰고 있다. 그 뒷쪽의 언덕은 과수원이고 오른쪽으로는 시원하게 들판이 펼쳐져 있다 명옥헌 바로 오른쪽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정자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뒷쪽으로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배롱나무가 혼재되어 있다.
아들이 벌써 물장구치고 놀고 있는 개울은 명옥헌 뒷쪽에서 앞쪽으로 흘러나온다. 정자의 뒷쪽 조금 높은 곳에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에 물이 차면 개울을 따라 명옥헌의 왼쪽 개울을 따라 흘러내려 명옥헌 연못으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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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의 옆모습
그 개울은 돌들로 되어 있는데 물이 흐르면서 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것이다. 이 정원의 이름이 울릴 명(鳴), 구슬 옥(玉), 추녀 헌(軒) 결국 "구슬같은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정자"라는 뜻이다. 물소리를 크게 들을 요량으로 계류를 위 연못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아래 연못으로 흐르게 했으니, 이 인공의 물길은 그저 물의 통로가 아니라 물이 돌을 걸치고 돌아 흐르며 소리가 커지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시각을 더하고자 연못가와 정자 주변은 온통 배롱나무로 뒤덮은 것이다. 세상 어느 나라의 어떤 정원이 이토록 청각과 시각을 절묘하게 배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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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옆의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어우러진 모습
명옥헌 마루에 걸터 앉으면 바로 아래 꽃대궐을 이룬 연못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시원스럽게 펼쳐진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명옥헌 정원 자체는 작은 규모이지만 과수원이며 들판이 마루에 걸터앉은 내 눈에 한꺼번에 들어오기 때문에 정원이 아주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차경(借景)수법이다. 빌릴 차(借), 경치 경(景)이니 말 그대로 경치를 빌려오는 수법인 것이다. 중국 소주를 가면 졸정원이라는 유명한 정원이 있다. 그 졸정원을 갔더니 가이드가 어느 지점에 서서 멀리 보이는 탑을 바라보란다. 그 탑은 졸정원 에 있는 탑이 아니고 정원에서 2Km나 떨어져 있는 오나라 손권이 세웠다는 북사탑인 것이다 그러나 그 탑과 정원 사이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그 탑이 꼭 정원 안의 조형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차경수법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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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본 명옥헌
일동삼물 중 환벽당 편에서 배롱나무를 잠깐 언급했지만 명옥헌의 배롱나무의 붉은 꽃은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사알짝 눈을 내리깔고 있는 듯한 요염한 첩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 수피또한 하얗고 맨들 맨들해서 여인의 속살을 만지는 듯하다.
아무리 점잖은 분이라도 명옥헌의 배롱나무를 만나면 늑대본성이 나타나지 않을까? 붉은 꽃을 달고 흰 몸줄기를 제 잎으로 만든 그늘에 숨기고 서 있는 배롱나무를 보면, 잠자리 날개 같은 모시 저고리 속에 훤히 비치는 여인의 속살을 보는 것 같은 야릇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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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안에서 바라다 본 풍경
아직도 한낮에는 저물어가는 여름이 마지막 힘을 다해 쏟아내는 열기가 뜨거운데 머리 복잡하시거든 가을에 살짝 발담근 이 계절에 명옥헌을 찾아 보시라. 그리고 가만히 연못을 들여다보라. 커다란 덩치의 나무가 피워낸 꽃잎들이 연못을 선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광경과 그 위로 푸른 하늘, 그리고 하얀 뭉개구름이 겹쳐지는 광경이 발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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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꽃이 핀 명옥헌의 앞모습
나오는 길에 마을을 막 벗어나면 명지원이라는 찻집이 있다. 그 안주인이 소프라노 가수여서 정원에서 자주 공연무대가 펼쳐지기도 한다. 찻집과 식당을 겸하여 하는 곳인데 고풍스러운 한옥의 통유리 바깥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전원풍경이 볼만하다. 이 집의 마당은 광활한 잔디밭인데 꼭 축구장 한개만한 크기이다. 이 집에서 500m 더 내려가면 한정식으로 유명한 전통식당이 있다. 한정식이란 자고로 안주인의 손맛에 따라 그 품격이 결정되는데 이집 안주인은 파평 윤씨 윤모 여사로 특히 젓갈맛이 일품이다. 40여가지 반찬이 줄줄이 나오는데 모든 반찬에 손한번 다 가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 많은 반찬이 남아서 나갈 때는 너무나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과식하게 되고. 그래서 저는 한정식집을 잘 가지 않는다. 우리는 굳이 가까이 있는 명지원을 마다하고 소쇄원 윗쪽에 있는 작지만 분위기 있는 명가은으로 차마시러 갔다. 명가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옮겨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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